Notes & Text

  • 기억7-유치원의 기억

    유치원을 가는 길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사정이 여유롭지 않아 유치원을 졸업하지 못하고 수료만 했다고 한다. 그래도 기억에 여름, 가을, 겨울은 보냈다. 

    유치원은 송탄에 있는 천주교 유치원인 샛별 유치원이었고, 가는 길은 네모진 흰색 돌이 정리되지 않은 채 깔려있어 울퉁불퉁한 좁은 골목길이 약간 오르막으로 되어있다. 가는 길에 유독 한 집의 개가 유난히 크고 무섭게 짖어댄다. 진한 코발트색의 대문이 있는 이 집의 문은 항상 열려있다. 지날 때마다 '저런 무서운 개가 있으면 문 좀 닫아놓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 집을 지날 때면 그 좁은 골목길의 벽에 최대한 바짝 붙어 개를 등지고 게걸음을 하여 피해간다. 

    하루는 목줄이 풀린 개를 보고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려다 울퉁불퉁한 블록의 모서리에 걸려 냅다 넘어진 적이 있다. 그 이후로 그 개는 내가 상대할 수 없는 큰 벽이었다. 

    유치원을 간 첫날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유치원의 기억이 시작된 첫날에 나는 분명 커다란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다. 물이 무서웠던 나는 겨우 몸을 반만 담근채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날씨는 많이 덥지 않은 데 수영을 시켜 그것도 맘에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수영모자가 없어 그것도 편치는 않았다. 그 중 유독 한 여자아이의 분홍색 커다란 꽃이 여럿 달린 촌스러운 수영모자가 기억이 난다. 

    점심시간에는 커다란 방에 커다란 좌상을 놓고 모여앉아 식사를 했다. 수녀님들이 식사를 내오시면 다 같이 앉아 식사기도를 올리고 식사를 했다. 그 중 케쳡을 잔뜩 뿌려 만든 김치볶음밥을 나는 가장 좋아했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어머니의 김치 볶음밥은 색깔이 좀 덜 빨갰다. 맛도 달랐다. 더 빨갛게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가 그날 나는 아주 매운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다시 만들어 준 빨간 김치볶음밥은 맛이 비슷했다. 

    유치원에서 하루는 자연학습을 한다고 놀이터에서 계단으로 내려가면 있었던 화단에 꽃을 심었는데 나는 그것이 재미없어 같은 반 친구였던 여자 아이 하나와 장난을 치며 놀다 선생님께 혼났다. 

    가을이 왔는데 놀이터 옆에 설치해놓은 수영장을 치우지 않았다. 하루는 수영장 물 속 안을 들여다 봤는데 물 위에는 소금쟁이가 헤엄치고 있었고, 물 아래는 썪은 낙엽들이 쌓여있었다. 수영장의 벽에는 무슨 벌레인지 모를 것들의 유충들이 매달려있었다. 

    졸업식날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부모님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들을 모셔놓고 춤도 추고 그동안 만든 것들을 전시하는 내 생에 첫 전시회를 했다. 춤을 출 때는 나를 비롯한 몇명의 아이들은 여자 짝꿍이 없어 남자아이와 춤을 췄다. 그와중에도 어머니는 내 한복을 챙겨 입히셨다. 나는 내 작품 중 종이죽으로 만든 바가지가 제일 좋았다. 

    자주색과 노란색으로 색칠한 바가지. 

  • 유행의 원위에서 복상사를 피하는 방법

    유행은 원위를 맴도는 점과 같다.

    그 속도는 우리가 움직이는 속도보다 항상 빠르다. 

    유행에 앞서는 자와 뒤쳐지는 자의 구분은 쉽지 않다. 

    다만, 유행을 쫓고자하는 욕구가 표출된 작업은 움직이는 유행의 끝을 간신히 붙잡고 뒤따라가는 모양새이다. 

    그 붙잡고 있는 끈의 길이가 다를 뿐 그것은 명백히 뒤에서 가고 있다. 

    원은 앞과 뒤가 없다. 유행의 입장에서 앞을 보면 앞서가고, 뒤를 돌아보면 뒤쳐진 것이다. 

    대중은 유행위에 올라탄 승객이고, 원안에는 이 원의 크기나 원을 도는 속도를 조정할 수는 결코 없는 미술계 인사들이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눈도 역시 유행이라는 점을 바라보다 문득문득 그 점의 앞과 뒤를 둘러본다. 그러다 종종 원의 속도가 빨라지면 뒤에 줄을 잡고 따라오는 작가들을 한참 유행을 앞서가는 사람들로 착각하기도 한다. 

    원밖은 더 큰 세상이다. 예술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더 많은 수의 사람들, 동물들, 식물들, 미생물들. 

    작가는 원위를 도는 선을 이루는 집합체인데, 유행이라는 점이 나를 스치고 지나갈 때 절정의 섹스를 능가하는 오르가슴을 느낀다. 그 점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사정하고나면 힘이 빠져 한동안 달달한 잠을 잔다. 간혹, 그렇게 영원히 잠드는 이들도 있다. 복상사일까. 

    그 점에 연연하지 말아야한다. 

    그 점의 존재를 잊어야한다. 

    그 점에 연연치 않는 방법은 두가지이다. 

    대중의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던가, 개인이 작가라는 정체성에 의미를 두지 말거나. 

  • 혁명

    과거의 혁명이 아무리 피로 물들었다고 하더라고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나 주권 탈취가 아니라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라는 개념에 우리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중에서

  •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결국엔 아무것도 우리는 볼 수 없고,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은 환상이요, 망상이다.

    순간이 보여지고 물리적 공간에서 가시화된다고 반드시 그것이 무엇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러한 시각적 행위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추상적인 감성을 가시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일 뿐이다.  

     

    나는 사진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고싶지 않다. 사진은 즉흥이요, 당시의 현재성으로 보여진다. 시제가 과거시제라고 해도, 그것을 마주하고 읽는 관객은 혹은 작가는 현재에 있다. 나의 눈앞에 보여진 것들은 기억의 조각이 아닌 즉흥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예술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도 없고 사람의 삶의 생생함을 전달할 수도 없다. 내 정체성을 예술행위를 통해 보여준다는 것은 길다란 터널안에서 보이는 터널 끝의 세상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은 의도와 반대이다. 작가는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고, 관객은 작가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내 정체성은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사람의 관점일 뿐이다. 본질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오롯이 나에게 소속되듯, 사진은 오롯이 눈앞에 보여지는 현상에 소속된다. 국가도,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그 외의 어떤 것도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오롯이 나에게 소속된다. 무엇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관점의 서술이거나 타인에게 나를 이해시키기 쉬운 도구로 기능한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역시 선택할 수 없다. 어느 것도 선택되고 의도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주어진 삶, 짐도 아닌, 선물도 아닌, 그 삶을 현재라는 시제로 읽고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2014년 여름.

  • 기억6-송탄으로 이사가던 날

    1983년 혹은 1984년 가을 경

    기억을 더듬어보니 가을이었던 것 같다. 

    정문에 서있던 헌병은 긴팔 군복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한국군의 것인지 미국군의 것인지 정확치는 않지만, 군견이 두어마리 있었고, 나는 그 개들이 무서웠다. 

    이삿짐 트럭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우리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의 친구분이라고 말씀하시며 누군가가 나에게 뭔가 이야기를 건냈고, 나는 그것이 언짢았다. 

    그래서 그 아저씨에게 "이 바보야!" 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 무척이나 혼났다. 오른쪽으로는 회색빛의 낮은 층의 아파트가 있었고, 왼쪽으로 나무들이 우거져있었다. 

    날씨는 선선했다. 

    삼촌이라고 불러야한다고 했다. 나는 나의 작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 아저씨는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내 막내 삼촌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 기억5-길동 외할아버지의 기억

    사거리의 '스탠드빠' 네온사인을 지나 저만치 언덕배기가 보이면 곧 외할아버지 댁이다. 

    언덕을 오르는 길 왼편에는 '림스치킨'이 오른편에는 문방구가 있었다. 늘 해가 높을 때 갔다가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의 기억은 거의 없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어머니 손을 잡고 엘레베이터를 타면 내가 4층을 눌렀다. 땡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면 길게 양옆으로 복도가 늘어서 있다. 집집마다 현관문을 열어둔 집부터 항아리를 복도에 빼곡히 내다 놓은 집까지 다양한 서울 길동 신동아 아파트이다. 

    3동 403호의 초인종을 누르면 외할아버지께서 반갑게 맞아주신다. "아이고 공부 잘하는 우리 연중이 왔어요~?"  오른편에 신발장이 있었고, 내 키를 훌쩍 넘도록 외할아버지의 빨간색 OB맥주 궤짝들이 쌓여있다. 

    왼쪽 부엌에서는 이모나 큰고모, 작은 고모 할머니께서 요리를 하고 계시고, 나는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기도 채 전에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간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보료위에 앉아계셨고, 정면에는 텔레비젼이 켜져있거나, 작은 빛바랜 노란색 좌상을 펴시고 주황색 독서등 아래에 책이 펼쳐져 있다. 내가 들어가면 할아버지께서는 작은 좌상을 왼편으로 밀어넣으시고 자세를 고쳐 앉으신다. 

    나와 동생은 차례대로 문안인사를 올린다. 절을 드리면 할아버지께서 한번더 "아이고 우리 공부 잘하는 연중이 왔어요? 이번에도 일등했나요?" 라고 하시며 웃으신다. 그러시고는 곧바로 뒤로 돌아 커다란 장롱안에서 만원짜리 지폐 한장을 꺼내어 주시며 "맛있는 과자 사먹어요." 라고 하신다. 

    그런 외할아버지가 좋았지만, 왠지 늘 뭔가 멀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함부로 할아버지 방에 뛰어들어가거나, 마루에서 뛰어놀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나와 동생 그리고 이종 사촌 동생들과 놀았던 곳은 늘 할아버지의 책이 뺴곡히 채워져있던 책향 가득한 방이었다. 그 방은 묘한 기운이 있다. 은은한 책 냄새와 함께 열어둔 창문새로 들리는 "신도옹아 세에타악"을 외치는 세탁소 아저씨의 공포스러운 메아리도 분위기에 한몫을 한다. 방의 두면을 가득채운 커다란 책장 중 창문이 없는 쪽 책장이 더 높아 내 손이 닿을 수 없었다. 그 위에는 빨간색 케이스의 오래된 실로폰이 있었고, 그 옆으로 미국의 막내이모가 놔두고 가신 Garfield 영어 만화책이 대여섯권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놀이는 2가지 정도가 있다. 

    사촌동생들과 함께 했던 놀이인데, 형광등이 느리게 켜지는 성질을 이용한 놀이였다. 

    그 놀이는 이슬이. 방에 불을 꺼놓고 술래는 "이슬아~이슬아~"라고 외치며 어둠속에서 사람을 찾다가 술래가 아닌 사람 중에 하나가 방 불을 켜면 불이 완전히 켜지기 전 깜빡거릴 때 술래에게 잡히면 다음 술래가 되는 놀이였다. 단 어둠이 있는 벽장이나, 이불 속에 숨으면 잡을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다같이 욕조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노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다. 외삼촌의 첫째 딸이 한참 어린 아기였는데, 같이 목욕을 하며 놀다가 아버지께 크게 혼났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은 고학년이니 이제 동생들과 목욕을 하며 놀 수 없다고 하셨다. 

    길동 신동아 아파트 3동 403호의 어린 시절 철없던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 이후로 외할아버지댁에서의 즐거움은 찾기 힘들어졌다. 

    문득 외할아버지가 보고싶다. 

  • About Identity

    1. 미국에서 막 유학을 시작하고 잠시 한국에 들어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참 고마우신 분께서 내 작업을 좋아해주셨다. 그리고 내 작업이 더 멀리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라시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감사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분을 다시 뵙기로 하고 가로수길 한 카페에서 뵈었다. 그 분께서 책을 하나를 건내주셨다. '한국의 정체성'. 그리고 우리는 일년에 몇번만 대중에게 공개된다는 간송미술관을 방문하여 겸재 정선의 산수화를 보았다. 집에 와서 그 책을 읽는데 죄송스럽게도 채 10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그만 덮어버렸다. 

    선물을 주신 분께도 죄송했지만, 한번도 뵈지 못한 필자에게는 더욱 더 그랬다. 

    어느 구절 하나도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없었다. 아무런 이유없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것이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가설만이 전제된 상태에서 독자를 설득하기 급급한 글로만 보였다. 

    2. 2008년 여름에 2주가량을 한국에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당시 나는 패션사진과 순수사진의 경계가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진가는 자신의 Style을 만들고 그 스타일 안에서 다양한 현재성을 지니는 트렌드의 요소들이 패션 사진을 만들었다. 

    반면 내가 이해한 순수미술은 시간과 시대적 가치 혹은 윤리적 도덕적 잣대를 뚫고 지나가는 통시성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결코 상업사진을 저평가하거나 순수미술을 성스러운 영역으로 올리는 시선은 아니다. 다만, 순수사진가가 패션 사진을 몇번 찍었다고 그 정체성이 패션사진가가 되는 것이 아니듯, 패션 사진가가 전시를 몇번 했다고 해서 순수미술가가 된다는 것은 예술의 경계의 모호성을 이용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한다. 

    한 유명 라이센스 잡지의 편집장을 만날 기회가 생겼고, 그 분도 흔쾌히 만남을 수락해 주셨다. 

    감사하게도 사진이 마음에 드신다고 하신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시는 것이 사진가가 오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적인 요소를 얼마나 트렌드하고 안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느냐라고 하신다. 한국적인 요소도 그렇거니와, 트렌드하고 안정적인 사진이라고 함은 결국 말안에서 논리적으로 보일 뿐 모두 시대와 공간에 한정을 지어 결국에는 창조적이지 못한 작가로 연명하라고 설득하는 것 처럼 들렸다. 

    그 분은 그분이 하신 말 앞에 '한국의 우리 잡지에서" 사진가로 오래 '버티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시기를 겁내는 사람으로 보였다. 

    3. 2011년 겨울에 한 사진 공모전 인터뷰를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유명한 작가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 학예실장부터 심지어는 외국에서 초빙된 유명 큐레이터와 비평가가 한자리에 보여 사진을 심사한다. 심사라는 말 자체가 사실은 좀 재미있긴 하다. 

    소수의 몇분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심사위원님들이 묻는 질문은 역시나 "한국이 작업에 어디있는가?", "무엇을 통해서 한국작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가?" 라는 류의 질문이 주된 핵심 질문이다. 혹자는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볼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수도 있겠다만,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게 어떻게 순수하게 궁금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면전에서 그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말은 차마 할 수 가 없어 대답을 대강대강하고 홀가분하게 자리를 떴던 기억이 있다. 

    4. 2013년 겨울에 한국에 잠시 들어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한 작가께서 뜬금없이 "어떻게 먹고 사니?"라는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먹고 사냐고? 나도 잘 모른다. 참 희한하게 풍족하진 않지만, 힘들었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자라지 않게 잘 먹고 산다. 물론 내 생계를 위한 주를 이루는 수입원은 상업사진이다. 패션화보도 촬영하고, 카달로그 촬영도 하고, 고맙게 가끔은 광고촬영도 들어온다. 

    물론 사실대로 대답했다. 나는 그것이 부끄럽지도, 숨겨야할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살아간다. 부모님께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결혼 후에 선언한 후 뱉은 말을 주워담기 어려워 시작한 내 주 수입원은 이제 나에게 고마운 존재이다. 

    그러자 그 분은 "전업작가"로 살아야 작가라고 할 수 있지 않겠냐는 눈치이다. 

    이건 무슨 앞, 뒤, 옆, 주위를 둘어봐도 맞지 않는 말인가? 나는 작가다. 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고, 내 상황과 여건에 상관없이 작업을 만든다. 아니 혹여 그 사람이 나에게 삶을 꾸려나갈 방도라도 마련해준다면 또 다시 생각해보겠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자기중심적인 말을 그렇게도 당당하게 할 수 있는지 그분의 용기에 박수를 칠 뻔했다. 

    국가의 정체성과 똑같이 모든 정체성을 규명하려고 안간힘을 쓰려는 사람들을 보면, 많이 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전업작가가 몇이나 되는가. 그나마도 대부분의 경우 빨라봐야 마흔 중반을 넘어서 작업만 하면서 여생을 보낸다. 

    교육기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작가도 있고, 학원에 나가 미술지도를 하는 작가도 있다. 나처럼 상업일을 받아서 생계를 꾸리는 자도 있고, 갤러리를 통해서 작업을 포장하고 판매하는 작가도 있다. 

    작가에 전업작가가 어디있는가? 의사를 두고 전업의사라고 하는 경우도 없고, 변호사를 놓고 전업법조인이라고 일컫지도, 회사원을 두고 전업 회사원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말은 어디에서 온 것인고 하니 전업주부에서 온 것이다. 심지어는 요즘은 가사노동도 분업화되어 전업주부를 찾기도 힘든 세상이다. 하물며 그 작가들은 스스로를 4-50년 전의 단어에 자신의 입장을 갖다붙여 마치 그것이 큰 훈장이라도 되는 양 훈계를 한다.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 작가이다. 다만, 내가 돈을 받고 만드는 사진을 내 작업이라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심지어는 그조차도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패션사진작가에게 열정을 쏟아부은 결과물은 그들에게 당연히 작업이다. 

    -나는 모든 일련의 세뇌과정을 거부한다. 

    한국은 내가 태어나진 곳이다. 다만 고맙게도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여려가지로 도움이 된 적이 있었을 뿐, 그것이 내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애국이냐 매국이냐의 이분법의 논리의 희생양이 되어야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심각한 논리적 오류이다. 나는 내 나라를 그리워하고 늘 생각한다. 하지만 내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작업에 내 나라를 사랑하는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내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뜨거운 사랑을 해본 자라면 알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순간 내 입에서 저멀리 달아나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사실만 더 강조해준다는 것을. 국가든 개인의 직업적 정체성이든, 결국엔 내게 주어진 적은 비율의 가능성안에서 방법에 대한 선택권만 주어진 것을 마치 개인이 모든 것을 개척하고 선택한 것으로 포장 혹은 세뇌하는 것은 결국엔 자위에 불과하다. 

  • 기억4-영화의 기억

    1983년 여름, 1986년 가을

    어릴 적 본 영화 두편이 기억난다. 

    [E.T. ]

    반팔을 입었던 기억이 나는 것으로 보아 여름이었다. 

    네돌때의 기억치고는, 또 그 이후로 이 영화를 본적이 없는 것치고 상당히 기억이 선명하다. 

    오른편에 어머니가 앉아계셨고 어머니 옆으로 아버지가 앉아계셨던 기억이 있지만 정확치는 않다. 

    ET가 냉장고를 뒤지는 장면에서는 사람들이 웃길래 나도 웃었다. 

    지루했다. 

    ET가 사람들에게 끌려가고 하얀 옷을 입고 있었는지 하얀 분을 뒤집어 썼는지 정확하지 않다. 내 기억으로는 엄마가 나에게 발라주는 하얀분을 뒤집어 쓴것으로 생각했다. 

    무서워서 어머니꼐 무섭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내 눈을 가려주셨다. 

    그리고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황진이]

    한복입은 배우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떠들어대는 영화였다. 

    넓은 돌판이었는지 잔디밭 수풀 우거진 곳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롱테이크 샷에서 점점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남자가 여자를 안는 장면이 나오자 어머니가 무서운 장면이라며 눈을 가려주셨다. 

    나는 그 때 ET의 무서운 장면을 떠올렸다. 

    하지만 손틈새로 남자가 여자 옷고름을 푸는 장면을 얼핏보았다. 

    그 뒤에 무서운 장면이 나올까봐 어머니의 손 안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