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s & Text

  • 기억5-길동 외할아버지의 기억

    사거리의 '스탠드빠' 네온사인을 지나 저만치 언덕배기가 보이면 곧 외할아버지 댁이다. 

    언덕을 오르는 길 왼편에는 '림스치킨'이 오른편에는 문방구가 있었다. 늘 해가 높을 때 갔다가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의 기억은 거의 없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어머니 손을 잡고 엘레베이터를 타면 내가 4층을 눌렀다. 땡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면 길게 양옆으로 복도가 늘어서 있다. 집집마다 현관문을 열어둔 집부터 항아리를 복도에 빼곡히 내다 놓은 집까지 다양한 서울 길동 신동아 아파트이다. 

    3동 403호의 초인종을 누르면 외할아버지께서 반갑게 맞아주신다. "아이고 공부 잘하는 우리 연중이 왔어요~?"  오른편에 신발장이 있었고, 내 키를 훌쩍 넘도록 외할아버지의 빨간색 OB맥주 궤짝들이 쌓여있다. 

    왼쪽 부엌에서는 이모나 큰고모, 작은 고모 할머니께서 요리를 하고 계시고, 나는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기도 채 전에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간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보료위에 앉아계셨고, 정면에는 텔레비젼이 켜져있거나, 작은 빛바랜 노란색 좌상을 펴시고 주황색 독서등 아래에 책이 펼쳐져 있다. 내가 들어가면 할아버지께서는 작은 좌상을 왼편으로 밀어넣으시고 자세를 고쳐 앉으신다. 

    나와 동생은 차례대로 문안인사를 올린다. 절을 드리면 할아버지께서 한번더 "아이고 우리 공부 잘하는 연중이 왔어요? 이번에도 일등했나요?" 라고 하시며 웃으신다. 그러시고는 곧바로 뒤로 돌아 커다란 장롱안에서 만원짜리 지폐 한장을 꺼내어 주시며 "맛있는 과자 사먹어요." 라고 하신다. 

    그런 외할아버지가 좋았지만, 왠지 늘 뭔가 멀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함부로 할아버지 방에 뛰어들어가거나, 마루에서 뛰어놀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나와 동생 그리고 이종 사촌 동생들과 놀았던 곳은 늘 할아버지의 책이 뺴곡히 채워져있던 책향 가득한 방이었다. 그 방은 묘한 기운이 있다. 은은한 책 냄새와 함께 열어둔 창문새로 들리는 "신도옹아 세에타악"을 외치는 세탁소 아저씨의 공포스러운 메아리도 분위기에 한몫을 한다. 방의 두면을 가득채운 커다란 책장 중 창문이 없는 쪽 책장이 더 높아 내 손이 닿을 수 없었다. 그 위에는 빨간색 케이스의 오래된 실로폰이 있었고, 그 옆으로 미국의 막내이모가 놔두고 가신 Garfield 영어 만화책이 대여섯권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놀이는 2가지 정도가 있다. 

    사촌동생들과 함께 했던 놀이인데, 형광등이 느리게 켜지는 성질을 이용한 놀이였다. 

    그 놀이는 이슬이. 방에 불을 꺼놓고 술래는 "이슬아~이슬아~"라고 외치며 어둠속에서 사람을 찾다가 술래가 아닌 사람 중에 하나가 방 불을 켜면 불이 완전히 켜지기 전 깜빡거릴 때 술래에게 잡히면 다음 술래가 되는 놀이였다. 단 어둠이 있는 벽장이나, 이불 속에 숨으면 잡을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다같이 욕조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노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다. 외삼촌의 첫째 딸이 한참 어린 아기였는데, 같이 목욕을 하며 놀다가 아버지께 크게 혼났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은 고학년이니 이제 동생들과 목욕을 하며 놀 수 없다고 하셨다. 

    길동 신동아 아파트 3동 403호의 어린 시절 철없던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 이후로 외할아버지댁에서의 즐거움은 찾기 힘들어졌다. 

    문득 외할아버지가 보고싶다.